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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MBC 신비한TV 서프라이즈


언론과 대중은 언제나 옳은가에 대한 논란이 끊이질 않는 것은 결코 '언제나, 항상, 모두' 는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요.
신비한TV 서프라이즈 720회 < 익스트림 서프라이즈. 누가 그를 죽였는가 > 편에서는 무려 40년간 영국 전역에서 논란이 된 살인사건, < A6 사건 > 의 진실에 대해 다룬다고 합니다.


영국 역사상 가장 논쟁적 사형.
1961년 8월 22일, 영국 버킹엄셔 도니 리치
데이트 중이던 불륜 커플, 발레리 스토리 (Valerie Storie)와 마이클 그렉스텐 (Michael Gregsten)
복면 강도에 의해 4시간 동안 도로를 달렸다.
다음 날 새벽, A6번 도로변에서 일어난 A6 살인사건.
마이클 그렉스텐 살해, 발레리 스토리 강간 후 총기 난사
22살 발레리 스토리, 어깨 아래 마비, 평생 불구로 움직이지 못하는 장애, 휠체어 생활


2달 뒤 체포된 25살, 제임스 핸래티 (James Hanratty)
범행 당시 스토리가 들었던 '조용히 안 해? 나 나쁜 놈(finking)이야' 라는 목소리와 범인의 눈동자로 '제임스 핸래티' 를 범인으로 지목.


런던 토박이 특유의 말투, 차가운 음성, 파랗고 커다란 눈동자
그러나 뚜렷한 동기가 없고, 절도 전과만 있던 제임스 핸래티.
당시 'DNA 검사' 기법이 없었기 때문에 단지 O형 이라는 것과 알리바이 입증이 되지 않았던 것, 그리고 '발레리 스토리 증언' 이 결정적으로 작용해 유죄 판결


하지만 제임스 핸래티는 사형 당하는 그 순간까지 '무죄' 를 주장했고, 재수사, 재심 요구 캠페인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언론, 정치인, 저널리스트, 법 인권운동가 등 < A6 변호 위원회, A6 Defence Committee >
존 레논, 오노 요코 부부 후원금 등 전국 각지에서 후원금이 모금되고, 핸래티 가족을 위한 캠페인 진행.
형 집행 정지 탄원서, 9만여명 서명.


그러나, 판결 6주 만인 1962년 4월 4일 제임스 핸래티 교수형
사형 집행 전날 가족 면회 당시, 동생에게 '누명을 벗겨 달라' 부탁


3년 뒤인 1965년, 영국 일반 사범 사형제 폐지
1998년, 영국 사형제 전면 폐지.


하지만!
제임스 핸래티 사형 후 새로운 비극의 시작.
A6 살인사건에 대한 의혹, 근거들이 새롭게 제기
2002년 BBC 다큐멘터리, The A6 Murder
변호사, 마이클 셰라드. 를 비롯해 제임스 핸래티 무죄 주장 등 이후 40년간, '사형제의 순교자, 무고한 희생자' 가 된 제임스 핸래티.

 

저널리스트, 폴 풋, 저서 '누가 핸래티를 죽였나 Who Killed Hanratty'
다른 용의자, '피터 알폰' 이 진범이라 주장


1997년 1월 27일자 인디펜던트 지 기사제목은 그릇된 교수형 Wrongly hanged: Hanratty is found
제임스 핸래티 명예 회복을 위한 A6 사건 재심 신청이 이어졌고,
1999년, 피해자 증거물 '속옷에 남은 정액 DNA' 와 '핸래티 유족의 DNA' 대조.
PCR 이라는 DNA 복제기법 분석 결과, 250만분의 1의 확률로 두 DNA가 일치.

 

PCR (Polymerase chain reaction) : DNA 복제기법, 극소량의 DNA를 복제해 법의학 분석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기법


그러나!
언론, 여론, 대중들의 의혹은 이어졌고, 결국 2001년 무덤 속 핸래티 본인의 DNA 와 대조.
대조 결과, DNA 일치.


40년 만에 밝혀진(?) 진실.
언론과 대중들이 무죄라 확신했던 '사형제의 순교자, 무고한 희생양' 제임스 핸래티가 진범이 맞았던 것.


사건 당시 가정이 있었던 마이클 그렉스텐.
강간과 총상으로 평생 휠체어에 앉은 채 살아야 했던 피해자, 발레리 스토리는 40년간 불륜 사실로 인한 윤리적 지탄과 무고한 희생자를 범인으로 지목한 거짓말쟁이로 비난 받아 왔던 것


법원 최종 판결 보도 후 지금까지 인터뷰를 하지 않았던 발레리 스토리 를 향해 '위엄 있는 침묵 (dignified silence)' 찬사
사건 후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던 발레리 스토리.
사건 10개월 후 직장에 복귀했던 그녀는 병든 부모를 부양하며 1983년 말 은퇴할 때까지 슬라우 지역 교통국 디렉터 겸 총무이사로 일하며 장애인 이동권 개선을 위해 헌신했다


사건 당시 2살이었던 피살자, 마이클 그렉스텐 아들, 앤서니 그렉스텐
역시 어머니와 자신이 눈치를 보며 위축된 삶을 살아야 했다고 고백

Posted by 아리아리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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